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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


호탕한 멋과 준엄한 원칙 위에 재능과 교양과 인품이 조화를 이룬 대인 ‘조지훈’

조지훈(趙芝薰 : 1920~1968)
  • 정의:한국 현대시의 주류를 완성한 청록파 시안, 수필가, 한국학 연구가
  • 자호:본명(本名)은 동탁(東卓)
  • 생애:1920-1968 해산(海山) 조헌영(趙憲泳)의 둘째 아들
  • 활동사항: 한글학회 국어 교본 편찬원, 진단학회(震檀學會) 구사 교본 편찬원, 한국 문학가 협회 창립위원, 사상계(思想界)의 편집위원, 민속학과 민족운동사에 공헌, 한국문화사를 최초로 저술
  • 저서:[한국 문화사서설], [한국 독립 운동사], [지조론]
  • 시집:[청록집(靑鹿集)](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공저), [풀잎단장], [역사앞에서],[여운(餘韻)], 시론집: [시의 원리], [시와 인생]
생전 서재에서 글을 쓰는 주지훈 선생

생전 서재에서 글을 쓰는 주지훈 선생

관향은 한양이요 본명은 동탁(東卓)이다. 제헌(制憲) 및 2대 국회의원이며 한의학자인 해사 조헌영(海山 趙憲泳)선생의 둘째 아들로서 1920년 일월면 주실(注谷洞)에서 태어났다.

전통 있는 선비의 가문이라, 한문과 국문을 배우기 시작한 어릴 적부터 문학예술을 갈고 닦아 온누리를 빛내리라는 큰 뜻을 품고 글짓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 9세에 벌써 시를 지었다 한다. 워낙 빼어난 재질이며, 게다가 얽매이기 싫어하는 소탈(素脫)한 성격이라, 왜정하의 학교 교육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중학 과정을 통시강의록으로 독학, 전문학교 입학 자격 검정 시험에 합격하여 혜화전문학교(東國大學의 前身)에 입학, 문과를 졸업하였다.

1939년, 10세에 문장(文章)지에 3번의 추천을 받고 문단에 데뷔한 천재적인 시인이다. 그러나 시 [석문(石門)]에 “원한도 사모칠량이면 지극한 정성에 열리지 않는 돌문이 있읍니다. 당신이 오셔서 다시 천년(千年)토록 앉아서 기다리라고 슬픈 비바람에 낡아가는 돌문이 있습니다.”에서 알 수 있듯이 나라 빼앗긴 민족의 하늘에 사무치는 원한과, 왜경(倭警)의 눈총을 맞고 박해 받는 민족주의자(民族主義者)에게는 정녕 하루가 천년 같은 암흑기(暗黑期)로 느껴 한동안은 오대산(五臺山) 월정사(月精寺)에 들어가서 수양 겸 숨어 지낸 적도 있었다. 민족 문화를 뿌리 채 없애려고 혈안(血眼)이 된 왜정(倭政)이 수많은 조선 문인들을 일본 제국주의에 아부하는 어용문인으로 별절 시켰을 때에 지훈은 징용이나 징발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끝내 왜적 앞에 굽히지 않아 젊은 선비의 절개를 맑게 지켰다.

해방 후, 국어와 국사 교육의 기초를 닦기에 힘을 기울이다

1945년 8월 15일 조국 광복을 맞이하여 시인(詩人)다운 유난한 감격으로 말살(抹殺)당한 민족 문화를 되살리기 위하여, 명륜전문학교 강사 직책과 아울러 한글학회 국어 교본 편찬원, 진단학회(震檀學會)구사 교본 편찬원으로서, 해방 전에 이미 조서어학회 큰 사전 편찬원을 지낸 경험이 있는 만큼 잃었던 국어와 국사 교육의 기초를 닦기에 힘을 기울였다.

1967년 문인들과 작품심사(왼쪽부터 서정주, 조연현, 조지훈, 백철, 박종화)

1967년 문인들과 작품심사
(왼쪽부터 서정주, 조연현, 조지훈, 백철, 박종화)

1946년 경기여고 교사로 지내던 중 그해 가을에 고려대학교 물리과대학 조교수에 취임하여 부교수를 거쳐 교수에 이르렀다. 이처럼 육성(育成)에 힘쓰는 한편 해방 후 이른바 “조선 문학가 동맹”이라는 좌익계열의 문인 단체가 문학을 정치 도구화 하려고 자못 맹렬한 기세를 올려 문학청년들을 유인할 때에, 이에 대결한 지훈 시인은 문학 동지인 김동리(金東里), 조연현(趙演鉉) 그 밖에도 많은 문사들과 함께 “한국 문학가 협회” 창립위원이 되어 문학의 순수성과 민족 문학의 수호 육성(育成)에 힘썼다.

여러 해 동안 여러 신문사의 신춘문예에 시(詩)부문 심사 위원이었으며, 교양종합지인 사상계(思想界)의 편집위원이기도 했었다.

독특한 지훈시의 취향을 풍기는 시인인 동시에 독실(篤實)한 학자였다.

시 창작을 계속하여, ‘청록집-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공저’, ‘풀잎단장’, ‘역사 앞에서’, ‘여운(餘韻)’ 등 4권의 시집이 있으며, 시의 원리 시와 인생, 2권의 시론집과, 당시선(唐詩選)이라는 번역시집이 있다.

1956년 자유 문학상을 받았으며, 1961년에는 벨기에에서 열린 국제 시인회의에 우리나라 대표로 참석하였다. 그 후에 한국 시인 협회장. 한국 신시60년 기념사업 회장을 역임하년서 한국 시단을 위해 지도 역할을 한 공로자였다. 강개(慷慨)한 시정신이 스민 가사(歌詞)도 많이 지었으니, 사육신 추도가, 인촌 조가(仁村 弔歌), 해공 조가, 유석 조가, 영양군민의 노래, 영양중학교가 등 그밖에도 많이 지었다.

선생은 독특한 지훈시의 취향을 풍기는 일류 시인인 동시에 독실(篤實)한 학자이기도 한다. 한국 문화사서설, 한국 독립 운동사, 신 채근담(新 菜根潭) 이라는 무게 있는 저서를 간행하여 학계에 공헌한 바 크며, 민족 문화의 집대성(集大成)과 민족정신 문화진흥에 불멸의 업적을 쌓았다. 고대(高大) 한국 고전 국역 위원장, 고대 민족 문화 연구소장, 민족문화추진 위원회 편집위원으로서 민족 문화의 내실을 다져 꽃피우고 열매 맺히기에 정열과 힘을 기울였다.

호탕한 멋과 준엄한 원칙을 지닌 ‘조지훈’

멋과 원칙이 있는 조지훈

멋과 원칙이 있는 조지훈

선생의 열렬한 애국심은 6.25동란 중에 문총 구국대 기획 위원장, 종군 문인단 부단장으로서 전투하는 국군 대열에 참가하여 평양까지 다녀왔으며, 전란이 끝난 후에는 공명선거 추진 위원회 중앙위원으로서 우리나라의 고질인 부정 선거를 버리고 민주주의 국가의 기본 요건(基本要件)인 공명정대한 선거가 실시되도록 하기 위해 애를 쓴 우국지사(憂國之士)이기도 하다. 그리고 역대의 집권자와 정치인들의 정치 철학이 없음을 한탄(恨歎)하였다. 나아가서는 철인 정치의 차원을 넘어 시인 정치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고 술회(述懷)하기도 했다.

지조론(志操論)이라는 저술을 펴낸 선생은 50평생 절개를 맑게 지킨 생애로, 왜정시대엔 일제(日帝)를 배척했으며, 해방 후에는 좌익세력의 물리치려고 경륜(經綸)있는 논객(論客)으로서 바르고 날카로운 논평을 폈다.

그 후 자유당 독재 정권에 저력 있는 저항을 계속하였으며, 5.16후에 최고회의의 고문으로 추대되었으나 불의가 엿보이자 박차고 나와 이에 대항한 인품이었다. 세상에 허다한 아세군상(阿勢群像)과는 생리적으로 반대인 맑고 곧은 지조 있는 대인군자(大人君子)였던 것이다.

지훈이 매천(梅泉 黃玹)과 만해(萬海 韓龍雲)를 사숙(私淑)함은 두 분의 탁월한 재질보다도 강직한 성격과 대쪽 같은 절개를 흠숭(欽崇)함이었다. 흔히 강직한 사람에게 따르기 쉬운 편협(偏狹)이나 완고(完固)함이 전혀 없으니, 천지 호연지기(天地 浩然之氣)하는 문자 그대로 도량이 크고 넓으며, 정 많고 한(恨)이 많아 유교와 불교의 교양 바탕에 서구(西歐)의 자유 민주주의 이념을 조화(調和)하여 보다 높이 승화(昇華)시킨 것이 시 예술의 아름다운 정서와 융합하여 이뤄진 민족의 전형적(典型的)인 인간상(人間像)이라 하리라.

숙환(宿患)으로 1968년 5월 17일 새벽에 별세하니 향년 49세이다. 21일, 문총(文總) 주최의 성대한 문인장(文人葬)을 엄수(嚴修)하였다.

1972년 서울 남산에 조지훈 선생 시비(趙芝薰 先生 詩碑)가 건립되었다. 1982년 8월 15일 37회 광복절, 내고장 영양 소년 지훈이 즐겨 놀며 시심(詩心)을 키우던 주실마을 울창한 숲에 지훈시비(芝薰詩碑)가 문하생(門下生) 들의 정성으로 건립되었다.

<자료출처 : 영양문화관광 사이트>